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신 분들이라면
이런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폴 프렌터만 없었어도
프레디 머큐리가
저렇게 되진 않았을텐데..
쓰레기 같은 폴 프렌터'
아닌가요?
저만 그런 생각을 한 건가요?
어쨌든 저와 같은 생각을
하신 분들이 있으실 것 같아...
제가 프레디 머큐리와
폴 프렌터의 관계가
어디까지 진실인지
한 번 찾아보았습니다.
영화를 보면 폴 프렌터가
보헤미안 랩소디를 작곡하기 직전의
프레디 머큐리를 유혹하고
동성애의 길에 직접적으로
끌어들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영화에서는 이 시기가
1975년인 것 처럼 나오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프레디가 70년대 초
브라이언 메이를 통해
메리 오스틴을 만나고
그녀와 사랑에 빠져 동거를 하다
청혼을 한 것이 1973년 입니다.
그리고 1974년에 퀸의
첫번째 히트곡인
Killer Queen이 나옵니다.
Killer Queen으로
드디어 돈을 좀 벌게 된 퀸은
바로 다음 앨범의 작업에 들어갑니다.
1975년 8월 부터
녹음을 시작한 이 앨범은
75년 11월에 발매되었습니다.
이 앨범에 그 유명한 명곡인
보헤미안 랩소디가 포함되어 있고
프레디가 메리를 생각하여 쓴
Love of my life 역시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시기까지 프레디와 메리 사이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A Night at the Opera 앨범
발매와 동시에 퀸은
투어를 본격적으로 돌게 되었고
프레디는 이 때부터
동성애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1976년 메리에게 자신이
양성애자인 것 같다고 고백했습니다.
영화에서 나온
'프레디 넌 양성애자가 아니야. 넌 게이야.'
라는 대사는 메리가 프레디에게
실제로 했던 말이라고 합니다.
이때까지 폴 프렌터는 프레디 머큐리 인생과
전혀 상관 없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폴 프렌터가 프레디와 처음 만난 것은
1975년 즈음이지만, 이 당시의
두 사람은 일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습니다.
폴 프렌터는 77년부터
퀸의 투어 매니저로 일하게 됩니다.
그 때 프레디는 이미 동성애에
빠져있는 상태였으니
폴 프렌터가 프레디를
끌어들인 것은 아닙니다.
프레디를 처음 퇴폐와
향락의 세계로 이끈 것은
위 사진의 데이비드 민스 입니다.
그는 시나리오 작가이자
프레디 머큐리의 평전
This is the real life의
공동 저자이기도 합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날 실수로
투어 매니저 자리에서 짤리게 됐는데
그것을 가엾게 여긴 프레디가
개인매니저로 고용하게 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깊어집니다.
관계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두 사람은 연인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폴이 프레디를 타락의 세계로
이끈 것은 아니지만 빠져나올 수 없도록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프레디가 섹스와 약에 젖은 생활에
허우적 대는 동안
폴은 프레디와 멤버들 사이의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프레디가 폴과 가까워 지면
가까워 질 수록
다른 멤버들이 폴을 싫어하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겠죠.
퀸은 82년 Hot Space를 발매했는데
이 과정에서 폴이 이리저리 간섭을 했고
(심지어 전반적으로 주도)
결국 멤버들은 분노로 폭발하게 됩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앨범은 히트하지 못했고
이 앨범을 내면서
퀸은 내리막길을 걷게 됩니다.
참고로 이 앨범의 히트곡은
Under Pressure입니다.
영화에서처럼 폴이
솔로 활동을 부추겼다거나
멤버들과의 사이를
이간질을 했는지는 모릅니다.
어쨌든 적어도 다른 멤버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 합니다.
팀은 투어를 마치고 휴식기에 들어갔고
이 시기에 프레디는 CBS 레코드와
일회성 솔로 계약을 하게 됩니다.
솔로 음반 작업을 위해
1983년 프레디는 뮌헨으로 갔습니다.
그렇게 되자 언론에서는 그 해 내도록
퀸의 해체설을 떠들어댔습니다.
실제로 잦은 다툼으로 인해
그 당시 해체 위기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합니다.
이 시기에 프레디는 뮌헨에서
여자 애인을 만들기도 했고
수 많은 남자들과 어울렸으며
훗날 죽는 순간까지 그의 곁을 지킨
짐 허튼을 뮌헨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다른 남자 질투심 유발용으로)
영화에서 보면 마치 폴이
프레디를 타락시키고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하게 하며
라이브 에이드 공연 소식 조차
모르게 한 것처럼 나오지만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폴은 Live Aid 공연 당시에도
프레디의 개인 매니저였습니다.
프레디는 폴에게 연민의 정을 느꼈고
안쓰러운 마음에 그의 말(요구)을
잘 들어주는 편이었습니다.
멤버들은 그런 프레디의
약한 마음을 이용하여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폴을 극혐했습니다.
영화에서는 라이브 에이드
공연 전에 폴 프렌터가
해고당하는 것처럼 나오지만
실제로 그가 해고된 것은 L
ive Aid 공연 약 1년 후인
1986년 입니다.
그리고 이미 아시겠지만
1987년 5월 4일
폴 프렌터는 THE SUN지에
프레디의 성적 취향과
에이즈 감염 의혹을 폭로합니다.
그가 받은 돈은 고작 3만 2천 파운드
약 5천만원이 조금 안되는 돈이었습니다.
물론 그 당시의 물가를 고려했을 때
최소 10억 정도 되는 돈입니다.
(당시 은마아파트가 약 5천만원)
프레터가 폭로하기를
프레디가 수백명의 남자와
잠자리를 했고
혼자 자기를 두려워 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애인들에게
다이아몬드, 차, 돈 등 어마어마하게
비싼 선물 공세를 했다고 합니다.
"나는 그가 여자와 데이트 하는 것 보다
차라리 물 위를 걷는 다는 것을 믿겠다.
그는 그의 첫 동성애 관계가
인도에서 학교를 다니던
14살이라고 했다.
투어를 돌며 그는 매일 밤
다른 남자와 만났다."
또한 프레디가 그와 원나잇을 한
승무원 존 머피가 1987년
에이즈로 죽자 자신에게 전화하여
"에이즈로 죽게 될까 두려워"
라고 했다고 폭로했습니다.
프레디는 며칠 뒤(1987년 5월 10일)
News of the World에서
"폴이 이런 짓을 한다니 믿을 수 없다.
제일 소름끼치는 건
폴이 죽은 사람들을 팔아서
돈을 번다는 것이다.
내 두 친구가 에이즈로 죽었고,
폴은 고인들에 대한 기억을
추문으로 쳐박고 있다."
라며 분노했습니다.
영화 속의 폴 프렌터가
실제의 그와 다를 수 있지만
영화만큼 그가 쓰레기였다는 것은
사실인 듯 합니다.
그의 곁에서 약 10년간 프레디의
연민을 이용했고 내쳐지자
배신했으니까요.
폴 프렌터도 결국 에이즈에 걸렸고
프레디 보다 3개월 앞선
91년 8월에 죽습니다.
게이인 그가 자손이 있을리
만무하고 이미 죽었으니
영화의 내용이 사실과 조금
다르고 모욕적이더라도
고소할 수 없겠죠.
더군다나 폴을 극혐했던
브라이언 메이와 로저테일러가
영화 제작에 참여했으니..
쓰레기로 만든 것도
당연한 것입니다.